거문오름에서 분출하기 시작한 용암은 선흘곶자왈을 돌아 김녕 덩개해안에서 서서히 멈춰서면서 바당빌레(용암대지)를 만들었다. 바닷물이 들고나면서 바당빌레는 드넓은 조간대를 펼쳐놓는다. 덩개해안의 조간대는 제주에서는 최대의 염습지이며 그에 따라 다양한 해양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당밭, 빌레왓을 일구는 동굴 위 사람들의 이야기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12월이 시작되는 날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을 찾았다. 지질트레일이 시작되는 김녕 바닷가의 드센 겨울바람은 체감온도를 더 떨어뜨린다. 바람은 곳곳에 널려 있는 현무암 바위와 함께 제주에 사람이 살았던 이후로 언제나 맞닥뜨려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런 척박한 환경을 일구고 살았던 제주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은 ‘바당밭, 빌레왓을 일구는 동굴 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땅 밖으로 분출하던 용암은 때로는 빨리 굳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 흐르기도 하면서 바위투성이의 화산섬을 만들었다.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은 바닷바람에 순응하면서 바위를 부수고 땅을 일구었던 제주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지질트레일은 김녕어울림센터에서 시작된다. 광장의 나팔꽃벤치라는 특이한 조형물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서면 세기알해변을 만난다. 김녕 바다는 에메랄드빛으로 유명하다. 오늘은 흐린 날씨에 바람이 불어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즈넉한 해안의 정취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바닷속으로 예전 둥그렇게 돌담을 쌓았던 ‘원담’의 흔적이 보인다. 원담은 밀물 때 들어온 고기가 썰물 때 나가지 못하도록 쌓아놓은 것으로 ‘돌로 만들 그물’이었다. 돌멩이로 가득 찬 어려운 환경을 도리어 생활에 활용했던 제주사람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바닷길은 ‘도대불’이라 부르는 제주의 옛 등대로 이어진다. 제주의 도대불은 1910년대의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국가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든 민간등대이다. 이것은 제주의 환경과 무관치 않다. 현무암 바위가 곳곳에 널려있는 제주바다는 배가 항해하는데 늘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구에 조그만 등대를 만들고 무사히 작업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했다. 보통 도대불은 사각형이나 사다리꼴이 많은데 김녕 도대불은 방사탑인 모양이 독특하다.
길은 마을로 들어선다. 집의 모습이 조금 바뀌고 시멘트길이 생겼지만 구불구불 돌아간 좁은 골목길은 예전 제주의 올레길 그대로다. 그리고 마을 중심에서 만나는 팽나무 한 그루. 제주의 마을 어귀에는 팽나무가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쉬어가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곳이기도 했다. 골목길은 바다와 인접한 곳에 있는 용천수로 안내한다. ‘청굴물’이라 했다. 둥그런 물통은 곡선모양의 길로 이어져 유명작가의 조형물을 연상케 한다. 물이 잘 빠지는 제주의 지질 특성상 땅 속으로 흐르던 물은 큰 암반지대를 만나면 땅 위로 솟아나는데 그것이 용천수이다. 청굴물이 얼마나 맑고 시원했던지 여름철 마을사람들은 밭일을 하면서도 끝나서 늘 청굴물에 발을 담굴 생각을 했다고 한다. 청굴물 말고도 마을에는 용암동굴 속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게웃샘물’도 있다. 이 샘물도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하던 귀한 용천수였다.
❶ 기하학적인 시멘트길과 물통이 어우러져 유명작가의 설치조형물을 연상케 하는 청굴물. 바닷가에 자리한 용천수로 얼마나 시원했던지 예전에는 여름이 되면 이웃마을 사람들도 찾곤 했다. ❷ 도대불이 불리는 김녕의 옛 등대. 일반적으로 다른 지역의 도대불이 보통 사각형이나 사다리꼴을 이루는 것과는 달리 김녕의 것은 원뿔모양을 이룬 것이 특이하다. ❸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게웃샘물. 동굴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로 상수도가 설치되기 전에는 주변의 200여 가구가 식수로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바닷길은 마을길을 지나 산길로 이어진다. 김녕에는 본향당을 비롯해서 여러 당이 있다. 그 가운데 지질트레일은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본향당, 궤네기당, 성세기당 그리고 바닷가의 해신당을 포함시켰다. 마을의 신당은 제주사람들의 삶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을이나 가정의 대소사가 있으면 당을 찾아 한해의 풍년을 기원했고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궤네기당은 궤네기굴이라는 동굴에 있어서 이름이 붙었는데 아주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동굴을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돗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철조망으로 입구를 막아놓았지만 동굴에서는 토기 등 선사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어 이곳이 주거지였음을 알려주기도 했다.
궤네기당을 돌아서면 입산봉이라는 오름이다. 예전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오름 전체가 무덤이다. 제주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서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되는 장면이다. 오름길은 성세기당을 거쳐 조른빌레라고 하는 바위지대로 이어진다. 빌레는 바위지대가 계속해서 이어진 용암대지를 말한다. 빌렛길은 덩굴식물이 있는 숲과 밭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고 겨울이지만 바위 위의 쑥부쟁이가 아직도 싱싱하다. 조른빌레 말고도 이곳 지질트레일에는 건강빌레정원, 진빌렛길도 있다. 겨울이 아니면 신발을 벗고 빌렛길을 걸으며 강렬했던 용암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리고 빌레가 끝나는 지점 절벽 아래에는 밭이 개간되어 있다. 바윗돌을 깨고 자갈을 주워 나르며 밭을 일궜던 제주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빌렛길이 끝나면 밭담 사이로 난 밭담길이다. 밭담은 때로는 직선으로 때로는 곡선으로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 얼마나 길고 모습이 독특했던지 어떤 이는 제주밭담을 흑룡만리라 칭하기도 했다. 사람이 쌓았지만 자연이 만들어놓은 것 같은 한 폭의 그림이다. 밭담은 경계 구실을 하기도 하고 드센 제주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냥 얼기설기 대충 올려놓은 것 같지만 돌담 사이의 구멍을 통해서 바람을 걸러주고 무뎌지게 하여 농작물의 보호막이 되어준다. 그래서 바람이 많은 바닷가 가까운 곳일수록 그 높이는 높다.
❶ 김녕마을에는 드넓은 빌레왓(바위지대)이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때로는 부수어서 돌멩이를 날라 밭을 만들기도 하고 들길로 이용하기도 했다. ❷ 용암동굴에 만들어진 궤네기당. 입구는 오래된 팽나무가 지키고 있다. ❸ 밭담에 파랑과 분홍으로 이루어진 지질트레일 리본이 매달려있다. 리본을 따라 길을 걸으면 된다. ❹ 새끼줄을 연상케 하는 용암의 새끼줄구조.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용암이 흐른 것을 말해준다. ❺ 제주의 밭담은 때로는 휘어지고 때로는 곧바로 나가면서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든다. ❻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돌담으로 쌓아놓은 환해장성. ❼ 김녕·월정지질트레일은 바닷가를 걸으며 바다를 직접 느껴볼 수 있는 특혜도 있다. ❽ 용암이 서서히 굳으면서 부풀어 오르다 안쪽의 가스가 터져 만들어진 튜뮬러스. ❾ 거북등을 연상케 하는 거북등절리.
밭담길을 돌아 나오자 월정리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2~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용했던 곳이 지금은 월정리 카페촌으로 올레꾼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면서 늘 사람들로 북적댄다. 여름이면 땅나리와 갯까치수영이 아름답게 피는 곳이지만 이곳에는 싱그런 쪽빛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이 최고의 장면일 듯싶다. 월정리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지질트레일은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바다를 보는 특혜도 있다.
그와 함께 용암이 빚어놓은 지각활동의 결과물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그만이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튜뮬러스라는 용암구조이다. 튜뮬러스는 빵조각을 연상케 하는데 용암이 굳을 때 부풀어 오르다 안쪽에 만들어진 가스가 터져나간 것을 말한다. 그 등을 덮고 있는 거북등 같은 거북등절리, 마치 새끼줄을 널어놓은 것 같은 새끼줄구조도 일품이다. 그리고 바닷가로 펼쳐진 조간대인 드넓은 바당빌레는 가슴까지 시원하게 한다. 제주도의 최대를 자랑하는 이곳 조간대는 그 넓이만큼 해양생물을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몇 발짝 육지로 걸음을 옮기면 고려시대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는 환해장성도 만난다.
제주에는 올레길을 시작으로 숲길, 둘레길, 지질트레일 등 시간을 잠시 내서 다녀올 수 있는 도보여행지가 많이 있고 그 나름대로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최근 만들어진 14.6km의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은 제주사람들의 속내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드센 바닷바람에 순응하면서 돌멩이를 깨고 농토를 일구며 삶을 지탱해온 제주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곳 도보 여행지를 지질트레일이라고는 하지만 지질적인 요소보다 제주사람들의 문화적인 요소를 더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소요시간은 대략 4시간 정도면 될 듯하다. 제주를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들은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걷기를 권한다.
에디터 / 이성권(1100고지습지 자연환경해설사)
포토그래퍼 / 오진권
촬영장소 /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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