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귀중한 제주 유산들이 사라지고 있다. 포구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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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2동 포구(다끈개) 다끈개는 인근 갯가를 정으로 일일이 손질해 손수 닦았다는 의미이다. 이 포구의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도 다끈개로 불리게 되었다. 포구는 ‘섯자리, 동자리, 뱃자리, 샛거리, 너븐거리’로 오밀조밀하게 축조됐다.

 

가장 제주적인 것이 무엇일까?

귀중한 제주 유산들이 사라지고 있다 – 포구I

 

 

제주사람들에게 ‘포구’는 기다림이요, 설렘이다.  포구는 마을을 뒷배경으로 하고 주위에 등대, 개당, 소금밭, 원, 봉수나 연대를 거느리고 있다. 그 앞에는 거센바람과 파도를 막는 여나 코지같은 자연지형이 위치한다. 제주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녹아있는 유산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어 제주다운 것을 지켜나가는 것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필요로한다.

 

조천포구

조천 포구(새성창·무근성창) 조천포구는 육지를 드나들 때마다 이용한 제주섬의 첫 관포(官浦)이다. 조선시대 이 포구를 드나들었던 관리들이 북쪽에 있는 임금을 그린다는 뜻에서 세운 정자인 ‘연북정’이 보인다.

 

언젠가 서울에서 사진가 한 분이 우리 미술관을 찾아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다가 느닷없이 ‘가장 제주적인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순간 나는 ‘가장 제주 적인 것이 무엇일까’ 하고 잠깐 생각을 했다. 너무 갑작스런 질문이긴 했지만 얼른 대답을 못할 것도 아니었다. 제주 하면 우선 한라산, 오름, 해녀, 그리고 돌과 바람일진데 질문하는 요지는 그것이 아닌 것 같아 고민에 잠기게 했다. 독특한 자연환경도 그렇지만 질문의 본뜻은 제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 또는 흔적을 물은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가장 제주적인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과연 지금 제주에는 가장 제주적인 것이 남아있기나 할까? 그것이 무엇일까? 이제 우리는 가장 제주적인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화산섬 제주, 섬 곳곳에는 제주사람들의 독특한 삶의 흔적들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 둘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렇게 사라지고 있는 것들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제주도는 80년대부터 시작된 급격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이뤄진 개발과 함께 귀중한 유산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제주의 포구(浦口)를 들 수 있다. 두 번에 걸쳐 제주 포구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없어져 버렸는가를 알아 보려한다.

제주 포구에는 제주 사람들의 삶이 있고 문화가 있다. 제주 포구는 삶의 터전으로 ‘개’ 또는 ‘원’이라는 ‘바다밭’이 있고, 식생활의 필수품인 소금을 만들어내는 ‘소금밭’이 있다. 포구는 진상품을 실어 나르는 바다 길목이며, 표류(漂流)와 유배(流配)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포구 곁에는 우리를 굳건히 지켜주는 수전소(水戰所), 봉수(烽燧), 연대(煙臺)가 있으며, 우리 마음을 위무(慰撫)해주는 당(堂)도 있다. 포구는 제주 섬사람들에게는 가장 귀중한 삶의 유산이었을 것이다.

제주 포구는 육지부의 나룻터와 구조자체가 다르다. 태풍의 길목인 제주바다는 풍랑이 거세어 그 어떤 시설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화산암 해안가 바위들은 무척 거칠어 옮겨 나르기도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바다로 나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구를 축조해야만 했다. 기상의 어려움 때문에 주변의 자연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렇게 만들어 진 것이 제주의 전형적 포구가 된 셈이다. 이제 제주 포구의 구조와 축조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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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엄 포구(철무지) 구엄 포구의 이름은 ‘철무지’로 이 인근은 자리돔밭, 소금밭으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포구를 감싸고 있는 절벽 위에는 원래는 나무로 된 것이었으나 1950년에 철제로 새로 만든 등대불이 서 있다.

▼고내 포구(고내성창) 고내리 바다를 일컬어 흔히 ‘요강터’라고 한다. 신엄리와 경계 지역인 강척코지’에서 ‘개구미’에 이르는 바다 바닥이 마치 요강처럼 움푹 패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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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제주 포구는 마을을 뒤의 배경으로 해서 자리잡고, 그 주위에 등대, 개당, 소금밭, 원, 봉수나 연대를 거느리고 있다. 포구 앞에는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막는 여나 코지 등 자연지형이 위치한다. 포구는 뭍으로부터 ‘안캐-중캐-밧캐’로 구성되어 있다. ‘안캐’는 맨 안쪽에 위치한 개라는 뜻으로, 태풍에 대비하거나 배의 수리를 위하여 배를 올리는 곳이고, ‘중캐’는 배를 좀 오래도록 정박시키기 위한 곳이다.

‘밧캐’는 배가 언제든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안캐-중캐-밧캐’를 가르는 두 개의 칸살은 서로 어긋나게 만들어 센 물살의 힘을 죽이려는 지혜를 발휘한다. 즉 안캐와 중캐를 가르는 칸살은 왼쪽이 짧고 오른쪽이 길게 했다면 중캐와 밧캐를 가르는 칸살은 그와 반대로 왼쪽이 길고 오른 쪽이 짧게 만들어 맞바로 밀려드는 물살을 조금이나마 눅이려 하였다.

‘밧캐’ 앞에는 파도의 힘을 수길 수 있는 장애물이 있다. 이 장애물은 여가 되기도 하고 코지가 되기도 하고 섬이 되기도 한다. 제주시 화북 ‘금돈지’ 포구인 경우는 ‘지방여’와            바람막이 구실을 하고, 제주시 삼양1동의 ‘동카름성창’ 앞에는

            , 조천읍 조천리 ‘큰물성창’ 앞에는 ‘개발머리, 오저여’, 조천읍 신흥리 ‘얼앙개’에는 ‘동바르코지, 뭉게여’, 안덕면 사계리의 ‘곱은개’는 ‘삼거리빌레, 올코지, 볼락통’이 있어서 거센 바람에 밀려오는 파도의 힘을 눅이게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지형 지물을 지혜롭게 이용해서 포구를 축조해왔다.

이런 포구는 자연적 장애물을 이용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 조건이 만족하지 않으면 사람이 직접 포구를 축조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제주시 용담동 ‘다끈개’이다. 포구 이름이 ‘다끈개’여서 이름에서부터 이 포구가 축조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포구가 위치한 해안은 포구가 될 만큼 바다가 육지 속으로 파고들어 간 곳이 없다. 그래서 ‘넓빌레’ 앞으로 성을 쌓아 포구를 만들었으니 ‘수포’(修浦)라 했던 것이다. 한자 ‘修’는 ‘닦을 수’로 읽기 때문에 한자의 뜻을 빌려 이 포구의 이름을 기록했던 것이니 ‘修浦’는 고유어 ‘다끈개’의 한자 표기에 불과하다. 제주시 도두리

       의 남쪽 방파제도 ‘송곳여’를 중심으로 축조하여 ‘만리장성’이라 이름한다. 이 방파제는 하늬바람을 막는다. 성산읍 온평리 포구도 성 쌓듯이 촘촘하게 포구를 쌓아 올렸다. 이처럼 제주 포구는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거나 부득이한 경우는 축조하며 뭍의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를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강영봉, 서재철공저 ‘기억속의 제주 포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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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 포구(솔락개·지픈개·테우낭거리·몰물개·배롱개) 월정리는 바람이 많이 불고 대부분 모래땅이라 농사지을 땅으로 적합하지 않아 포구가 발달했다. 하지만 지금은 옛 포구자리 대부분에 해안도로가 뚫리면서 매립됐고 새로운 포구가 축조됐다.

 

제주 사람들에게 ‘포구’는 기다림이요, 설렘이다. 해안가 마을이면 어느 곳이든 크고 작은 포구들이 자연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사진을 시작한 68년부터 가끔씩 포구를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빨리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포구가 그냥 좋아서 찍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해 인가 선조들이 등짐으로 지어 만든 포구들이 시멘트로 포장이 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러다간 옛 포구의 모습이 변해버리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포구사진을 찍기 시작 한 것이 1974년부터다. 교통편이 어려웠던 시절, 해안가 마을을 찾아다니며, 포구 주변 지붕 위에 올라 포구의 형태를 찍기도 했고, 전주 위에 올랐던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급기야 80년대 들어서 해안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하면서 제주 포구의 수난이 시작됐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제주 해안을 관광자원화 한다는 목적으로 제주시 용담동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해안도로 공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도민들은 ‘해안가에 형성된 용암류의 신비한 자연뿐 아니라 귀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질 위기’라고 반대했었으나 관광객 편의시설이란 명분으로 공사를 강행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관광수입이란 명분 앞에는 문화유산이고 자연보전이고 필요없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당시 신문에 몇 차례 도민들의 반대여론을 보도하자 도 관계자는 ‘앞으로 계획된 해안도로는 재검토하고 현재 공사중인 지역의 자연파괴를 최소화 하겠다.’고 계획수정을 밝혔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공사 강행으로 뒤바뀌었다. 이유는 지역주민들의 강력한 요청이라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은 해안도로가 뚫리면 마을의 발전은 물론이고 관광객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해안도로는 일사천리로 추진되었고, 이로 인해 제주 섬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포구가 매립되거나 확장되며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지역주민들의 또 다른 주장은 배의 톤수가 커지면서 현재의 포구는 사용 할 수 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선조들이 거센바다를 개척하며 살아온 터전인데 그렇게 없애버리기엔 너무나 귀중한 것이 바로 포구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귀중한 포구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일부 뜻있는 도민들의 ‘전부는 아니라도 지역적으로 몇 개의 포구는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었다. 필자가 문화재위원일때 포구의 지방문화재 지정을 정식으로 제안했었다. 대부분 포구들이 매립되어 버린 상황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포구들 중에서라도 하루빨리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 제안조차 받아들여지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 결국은 우리 선조들의 바다개척사가 담겨있는 옛 제주의 포구는 그야말로 ‘기억속의 포구’가 되어 버렸다. 옛 제주 포구야 말로 가장 제주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한 순간의 판단착오로 우리는 아주 귀중한 문화유산을 파괴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 나는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그때 부지런을 떨며 포구사진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제주 포구는 기억속의 포구가 됐겠구나 하고. 이렇게 기록된 포구사진들이 훗날 귀중한 자료가 될 줄은 나도 생각지 못했다.

 

아이러브제주도장


에디터 / 서재철

포토그래퍼  / 서재철

1947년 제주출생, 1983년 사진부장(전;제주일보),  1990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전;재민일보),  1998년 자연사랑 미술관 관장(현)

저서 : 제주해녀, 한라산, 한라산 노루, 한라산 야생화, 바람의 고향 오름, 이름모를 소녀, 몽골·몽골사람, 제주생태시리즈-제주의 야생화, 제주의 말·노루, 제주의 곤충, 제주의 버섯, 제주의 새, 화산섬 바람자리 오름, 날마다 솟는 성산, 기억속의 제주포구, 화산섬 제주, 신비의 흔적, 제주의 옛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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