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제주올레에서 허벅을 만나다

제주올레1

올레는 집 대문에서 마을 길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어로, 돌담의 아름다움과 독특한 문화, 소박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주올레에서 허벅을 만나다

 

요즘 전국에서 ‘제주 올레’ 바람이 불고 있다. 올해 들어 부쩍 제주공항에는 올레길을 걸어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올레’는 빠른 속도로 유명해지는 한편 잘못 알려지고 있다. 원풍경(原風景)을 잃어버리고 변질된 의미를 반추하게 될 때 금방은 톡 쏘는 입맛을 느낄지 모르나 두고두고 아껴먹고 음미하는 그 소중한 맛은 간직하지 못하고 만다. 사람들이 그토록 먼 길을 마다않고 허위허위 올레를 찾아오는 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소박한 맛, 무광택의 은은한 기억을 찾아서일 것이다.

 

 

돌담07

돌담을 따라 내려온 덩쿨잎이 정겹다. 

 

 

제주의 전통적인 초가를 보면 올레가 있어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 ‘올레’란 집으로 출입하는 골목길을 말하는 제주어(濟州語)이다. 올레가 반드시 제주에만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지방에도 이런 골목길은 있겠으나 제주의 올레에는 독특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빛깔과 리듬이 있다. 단순하게 통로로서의 기능만 설명해버리고 말면 어딘가 아쉽고 마음 한구석이 서운해지는 게 제주의 올레이다.

올레는 탐욕스럽게 먹어대는 길이 아니다. 어느 정겨운 마을 안으로 가만가만 걸어 들어가면 낮은 돌담을 끼고 적요하게 휘어진 길을 만나게 되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문득 마당이 나오고 툇마루에 앉아서 콩깍지를 까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는 그런 고즈넉한 맛이 올레의 맛이라 할 수 있다.

시골마을의 웬만한 집에는 거의 올레가 있었다. 생활공간인 방은 옹색할 정도로 작고 보잘 것 없을지언정 제주사람들은 문을 여닫는 대문 대신에 열린 공간의 올레를 두었던 것이다. 일직선으로 난 올레도 있으나 거의 대부분의 올레는 S자 형태로 리드미컬하게 굽이져 있다. 확 꺾어지는 골목길이 아니라 은근슬쩍 굽이돌아 나가는 부드러움이 있다. 그래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집은 활짝 열어젖힌 것도 아니요, 완전히 감춰진 것도 아닌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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❷ 조붓하게 휘어 돌아가는 제주올렛길에서 아릿한 삶의 구비를 본다. ❸ 까만 돌담과 노란 감귤이 대비를 이루어 더 앙증맞게 느껴진다. 제주감귤은 가을부터 수확이 시작된다.  ❹ 늙으신 어머니 같은 초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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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식구들의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하나 세세한 내용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집안에 사람이 있음을 짐작하게만 할 뿐 대화의 내용은 새어나가지 않았다. 올레는 열려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차단벽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게 올레는 그 집의 아름다운 여백(餘白)이 되어주었다.

또한 올레는 그 집의 탯[胎]줄이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이웃과 연결되는 끈이었다. 집안 식구들만의 전용도로라 할 수 있는 올레가 끝나는 지점에서 세상으로의 길은 시작된다. 이 접점(接點)에 정주목을 양옆에 세워두고 정낭을 걸쳐두는 집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주사람들은 아무것도 설치하지 않았다. 그냥 열린 공간이었다.

그러나 올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문, 마음의 대문이 존재하였다. 제주사람들은 무턱대고 남의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올레의 입구에서 나름대로의 기척을 하였다.

 “순덱이어멍 잇이냐?”

 “아시, 잇어(아우, 있는가)?”

올레를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서 자신의 방문을 집안사람들이 알아채도록 밝히는 것이 예의였다. 주인도 마실을 갔다가 돌아올 때는 올레에 들어서면서부터,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해서 당신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집안에 있는 식구들에게 알리곤 했다. 출타할 때에도 올레를 나가면서 기척을 하곤 하였다.

올레를 들어서면 그 집에서 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옹기로 만들어진 물 긷는 허벅이다. 바구니에 넣어져 언제든지 물 길러 갈 준비가 되어있는 허벅이야말로 부지런한 제주여성의 상징이다. 어느 집에나 부엌문 입구에는 물팡돌이 있다. 허벅만을 놓아두는 곳으로 이곳에 허벅이 없으면 어머니가 물 길러 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선 성종 때 제주에 추쇄 경차관으로 왔던 최부(崔溥, 1454-1504)는 독특한 풍속을 읊은 「탐라시(耽羅詩)」 35절을 남겼다. 그 중 28절의 시에는 허벅을 등에 지고 물 길러가는 제주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지 않고 등에 지고 가는 여인들이 퍽 신기해 보였나보다.

 負甁村婦汲泉去 허벅 지고 촌 아낙은 물 길러 가버리고

 橫笛堤兒牧馬歸 피리 불며 아이 데리고 말테우리[牧子]는 돌아오네

 

제주올레4

 

❺ 부엌 입구에서 항시 대기 중인 물허벅.  ❻ 물과 여인은 생명의 상징. ❼ 건조 중인 허벅들.  ❽ 빈허벅을 등에 진 여인은 남을 앞질러 가서도 안 되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도 안 되었다. 물이 담기지 않은 빈허벅은 생명력 부재의 상징이다.

 

제주올레5

 

육지부에는 마을 안에 우물이 있었고 길에는 돌멩이가 그다지 없어 평탄했기에 여인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예전, 제주의 길은 온통 자갈 투성이었다. 게다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정신 사납게 설치며 불어대는 무법자 바람은 어떤가. 행패가 심한 날은 건강한 장정도 제 한 몸 가누며 걷기가 힘들었다.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는 듯한 서슬로 사람을 길 구석으로 밀어붙여 패대기칠 때도 많았다.

제주에는 마을 안에 우물이 없었다. 해안마을에서는 썰물이 빠져나간 바닷가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산간마을은 돌투성이의 냇가에 고인 빗물을 길어다 사용했다. 만일 제주의 비바리[處女]들이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나른다면 서너 발자국 못가서 필경은 엎어지고 말리라. 또 물동이는 하루에도 몇 개나 깼을는지…. 이처럼 가혹한 자연환경에서 어렵게 구한 물을 한 방울이라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한 지혜로 허벅을 물구덕이라는 대바구니에 넣어 안전하게 등에 지고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허벅은 언제 등장한 것일까?

 제주도에는 신석기유적을 대표하는 고산리 출토 토기에서부터 청동기인 상모리토기, 철기시대인 삼양동토기와 곽지리식토기,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종달리토기, 용담동제사유적토기, 고내리식토기 등,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들어내는 오랜 토기·도기 전통이 존재해왔다. 뿌리 깊은 제주의 도기문화가 독특한 형태의 허벅을 만들어낸 밑바탕이 되었다.

근대의 옹기는 흑도(黑陶)에 가까운 무문옹기에서부터 점차 검은색에 가까운 유문옹기로 발전했다. 제주도의 경우 기와를 구워내던 와요[瓦窯]를 ‘검은굴’이라 했다. 이 가마에서 생산된 기물에는 ‘지세[디새:瓦]’라는 명칭이 붙는다. 예를 들면 지세허벅 지세항 지세시루 지세화로 등이다. 지세그릇은 900도 내외에서 소성되며 마지막 과정에서 연기를 먹여 빛깔은 흑회색을 띤다. 이와는 달리 1,0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지는 옹기가마는 ‘노랑굴’이라 했다. 생산되는 옹기의 빛깔이 발갛게 밝았으므로 붙여진 속칭이다.

허벅은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인문적 배경이 반영된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물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담아 안전하게 운반하기위하여 배는 둥글게 부르고 목은 좁게 만들어졌다. 부리 또한 손을 대어 들어올릴 정도로 좁다. 이러한 형태로 완성되기까지의 상세한 고찰은 아직 미흡하나 조선시대에는 이미 완성된 형태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벅은 철분이 많은 제주도의 화산회토 영향으로 몸체가 유난히 붉은색을 띤다. 유약을 전혀 바르지 않고 구워냈으나 땔감 나무의 진액으로 자연유가 형성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선사시대 토기에서나 볼 수 있는 빗살무늬가 전체에 베풀어져 허벅 고유의 미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이다.

제주는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다도 습도가 높고 강우량이 많은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의 광도(光度)는 유난히 밝고 강렬하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나뭇잎들은 참기름을 갓 바른 듯 초록빛으로 반들거리고 땅에는 얼음이 박히지 않는다. 한라산 남쪽의 햇살에 담긴 당도(糖度)는 신혼부부의 사랑보다도 더 달콤하다. 제주의 허벅에 잔뜩 새겨있는 저 빗살무늬, 그건 강렬한 생명의 빛살이다! 허벅에 단순한 물이 아니라 어기찬 생명력을 담고 싶어 하는 제주여인들의 염원이다.

허벅에는 까다로운 금기(禁忌)가 있다. 빈 허벅을 등에 지고 남을 앞질러 가서도 안 되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도 안 되었다. 특히 아침녘에 남성들은 외출하다가 빈 허벅 진 여인을 만나면 재수가 없다고 하여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물이 담기지 않은 빈 허벅은 생명력 부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허벅은 물 긷는 용도 외에도 각종 곡물씨앗의 보관, 술이나 간장 등의 액체를 보관하는 용기로도 사용되었다. 사돈집이나 친척집이 상(喪)을 당하였을 때에는 붉은 팥죽을 쑤어서 담아갔으며 혼례식 등의 여흥에서는 놋숟가락으로 어깨부분을 쳐서 흥겹게 장단을 맞추는 악기의 역할도 하였다. 속에 담긴 물의 양에 따라 그 음색(音色)을 달리하는 허벅장단이야말로 제주의 특색을 담은 소리라 하겠다. 이렇듯 제주의 허벅에는 제주의 빛깔과 소리, 제주의 삶이 담겨 있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치면서 수도가 보급되고 플라스틱 그릇에 밀려 옹기가마들이 문을 닫으면서 허벅은 급속히 사라져갔다. 제주도는 지난 2001년 제주문화의 특성이 잘 나타나있고 그 기술을 전승 보존할 가치가 있다 하여 무형문화재 제14호<제주도 허벅장>을 지정하였다. 허벅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생명의 빛살을 담던 그릇이었다. 전승에 있어 단순히 허벅의 형태만을 빚어내는데 그치지 말고 한 방울의 물도 소중히 하던 마음까지도 이어졌으면 싶다.

바닷가나 산길을 걷고도 제주 올레를 발목이 저리게 걸었노라며 뿌듯해하는 그대여, 어진 목숨의 그대여. 제주에 오거든 이끼꽃이 드문드문 핀 해묵은 올렛담을 끼고 돌아드는 조붓한 진짜 올레를 찾아 가슴에 품으시라. 그리고 허벅의 생수로 허기진 그대 영혼의 갈증을 채우시라.

 

아이러브제주도장


에디터 / 김순이

포토그래퍼 / 오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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