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특집] 제주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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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色의 거친 돌과 함께 살아온 제주인의 생활, 돌은 제주의 삶과 문화 그 자체이다.

제주도에 가장 많은 것은? 흔히들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삼다의 섬으로 제주도를 일컬어왔다. 바람은 바다에서 불어오니 손님과도 같고 여자 또한 제주도에 살다 떠나는 客이라 할 수 있다. 바람과 여자가 제주섬의 여행자와 같다면 돌은 제주도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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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생성 이후에 붙박이처럼 제주를 지켜온 것은 다름 아닌 돌이다. 불구덩이에서 솟구친 돌덩어리들이 섬 전체를 만들었다. 제주의 돌은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현무암이다. 화산폭발의 열기에 의해 생긴 수없이 많은 숨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제주에는 이런 돌들이 흙보다 많다. 제주사람들은 눈을 뜨면 돌을 봐야했고 삶과 죽음에 관련된 어느 것 하나 돌이 이용되지 않은 것이 없다할 정도로 많이 쓰였다. 돌을 이용하여 다양한 건축물을 쌓고 지었으며 돌로 도구를 만들어 이모저모 쓰임새로 사용하였다. 돌과 제주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사람들은 돌투성이, 화산회토 토양에서 돌을 골라내 일궈 밭작물을 키우고 그곳에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곡식과 채소를 얻었다. 척박한 땅에서 생존 해나가기 위해 너무도 많은 땀과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흙속에서 골라낸 돌,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돌멩이는 생활환경을 지키는 막이가 되었다. 제주의 많은 돌은 밭담이 되고 올레가 되었다. 사람들은 ‘올레’를 지나 집을 드나들고, ‘밭담’이 쌓여진 밭에서 하루 종일 일한다. ‘돌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았고, 곤궁한 삶을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또는 사악한 기운을 쫓아달라는 기원을 담아 ‘탑’을 쌓았다. 빈번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바닷가에 돌로 ‘장성’을 쌓았다. 심지어는 죽은 이들의 보금자리에도 ‘산담’을 쌓았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하고 슬기로운 돌문화는 제주인의 삶을 이해하는 척도이다. 돌은 제주사람들에게 신앙의 매개체이자 생활의 필수요소로서 돌문화를 통해 제주의 삶과 문화, 역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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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환해장성의 흔적과 바닷가 밭담이 혼재해있다. 세월의 흐름 앞에, 모진 바닷바람에 점차 그 온전한 형태를 잃고 있는 돌문화유적이다. ❷ 잣성 또는 잣담이라고 불리는 돌담으로 중산간 마소를 놓아기르는 곳에 만들어진 목장 경계용 돌담으로 둘레길이나 숲길, 곶자왈, 목장지대를 지날 때 볼 수 있다. ❸ 신양리 바닷가에 세워진 방사탑이다. 방사탑은 풍수지리상 허하고 사악한 기운이 있다고 믿어지는 곳에 이를 막기 위해 세웠다. 남쪽 포구쪽에 위치한 탑은 바닷물에 잠길 때가 많아 신비로움이 더한다. ❹ 무덤 주위에 쌓은 돌담인 산담이다. 산담이 밭이나 오름 등 생활권과 가깝게 위치해 있어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는 제주 특유의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❺ 제주도는 유네스코가 인증하는 세계지질공원이다. 화산활동에 의해 탄생한 섬이라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고산 수월봉은 화산재가 겹겹이 쌓아 만들어진 판상과 화산분출시 날아간 돌덩어리가 박혀있는 탄낭구조를 볼 수 있는 지질명소이다.

 

제주의 돌, 제주인의 삶과 문화의 큰 축

제주도는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섬이다. 화산활동의 산물인 현무암이 제주전역을 덮고 있다. 돌밖에 아무 것도 없다 할 정도로 돌투성이 땅이다. 밭을 일구려면 얼마나 많은 돌을 골라내야 했는지, 땀과 노력으로 골라낸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 돌담이 되었다. 돌담은 자리한 곳에 따라 밭담, 잣성, 올레 등 다양하게 불린다. 제주의 돌담이 얼마나 길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비행기에서 제주 섬을 내려다보면 확인할 수 있다. 검은 빛 돌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이가 9천7백리에 이르러 흑룡만리(黑龍萬里)라 불린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돌담을 경계로 ‘돌랭이’라는 작은 밭들이 맞닿으며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까이에서 돌담을 보면 그다지 기교가 없이 대충 쌓은 것처럼 보인다. 돌담 자락 중간 중간에는 구멍이 숭숭 나있어 제대로 담 역할이나 하는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이 안에 자연을 이기는 슬기로움이 숨어 있으니 돌담이 거센 태풍이나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돌담 사이의 구멍 때문이다. 무심하게 쌓아올려진 것처럼 보여도 돌담을 쌓는 전문기술인이 있을 정도로 돌과 돌 사이의 접점을 잘 찾아내 태풍에도 끄떡없는 돌담을 쌓는 것은 요령이 필요한 일이다. 잘 쌓여진 돌담은 제주도를 할퀴며 지나가는 바람을 달래어 잦아들게 하는 역할을 한다. 돌담을 쌓기 시작한 것은 밭을 일구기 위해 골라낸 돌들로 휘몰아치는 바람을 막는 방풍의 용도가 먼저였다. 경작지를 구분하는 용도로 밭담이 생긴 것은 언제부터라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으나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고려(高麗)고종 12년부터 27년까지 제주판관 김구(金坵)가 “약한자들의 토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밭담을 쌓게 했다.”고 한다. 돌담으로 밭 경계를 만든 뒤부터 토지의 침탈, 분쟁 등 폐해가 사라지고 우마 침입과 풍해까지 방지하게 되었다. 밭담의 높이는 보통 사람의 허리선 정도이다. 충분히 너머를 들여다볼 수 있는 높이로 경계를 짓는 담이긴 하지만 단절이 아닌 이웃과 소통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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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밭가에 쌓아놓은 밭담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밭담과 밭담 사이에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길을 내어 이웃을 배려하였다. ❷ 밭과 밭 사이의 돌담이 바람을 막는 방풍의 기능이 1차적이었으며 고려(高麗)고종 12년부터는 밭의 경계표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❸ 제주의 돌담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전한다. 가을 빨갛게 물들어가는 담쟁이 잎이 흑색 돌담과 대비되어 운치있다. ❹ 제주에는 논을 경작하는 것이 거의 없고 밭에는 대부분 보리나 조, 메밀 등의 곡식과 채소를 심었다. 봄,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보리이삭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휘어진 ‘올레’ 너머 빠금히 보이는 초가지붕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집이 나지막하다. 초가지붕의 띠가 날아가지 않도록 굵은 밧줄로 바둑판처럼 얽어 놓았고 그 밧줄 끝에는 돌멩이를 매달아 두었다. 바람을 이기는 지혜가 담겨있는 특이한 방식이다. 벽면은 잘 다듬은 ‘가끈돌’로 쌓았고 그 틈새는 흙과 보리 지푸라기를 썰어 섞어서 칠을 하였다. 집 주위에 둘러치는 울담은 꽤 높다. 행여 모진 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올 세라 꽁꽁 막아서기 위해서다. 바람에 대한 경계로 꽉 막기만 할 것 같은 주거문화는 대문이 없이 정낭을 걸쳐 사람이 있고 없고를 표시해서 이웃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배려가 보인다. 큰길에서 집으로 통하는 긴 길은 돌담을 쌓은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져 있다. ‘올레’다. 바람이 직접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뿐더러 꺾어지는 부분(올레목)을 두어 집안이 보이지 않도록 사생활을 보호하였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제주올레’의 올레가 바로 이 제주의 마을 큰길에서 집안으로 통하는 좁은 길을 의미한다. 집안에는 돌을 이용한 살림살이들이 많았다. 화산섬이다 보니 물이 아주 귀해 생명수와도 같은 물을 수시로 길어 나르기 위해서 부엌 바로 옆에 돌 받침대인 ‘물팡’을 마련해 두고 그곳에 주둥이가 좁은 물 긷는 항아리인 물허벅을 놓아두었다. 난방과 조명의 역할을 하였던 사각형의 붙박이 화로인 ‘부섭(봉덕)’도 돌이다.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하여 집에 거의 온돌을 설치하지 않은 대신 부섭을 이용하여 실내를 덥혔다. 불을 지펴 간단한 음식을 끓이거나 옷을 말리는 용도로도 사용하였다. 밭의 씨앗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다지는 ‘돌테’, 쟁기질을 해보지 않은 소에게 쟁기질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는 구멍 뚫린 돌은 ‘곰돌’, 곡식을 찧는 ‘돌방에’, 곡식을 가는 ‘고래(맷돌), ‘풀고래)’돌로 만든 함지박인 ‘돌도고리’ , ‘돌등잔’ 등 생활용구에 다양하게 돌을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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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벽면은 잘 다듬은 ‘가끈돌’로 쌓았고 그 틈새는 흙과 보리 지푸라기를 썰어 섞어서 칠을 하였다. 집 주위에 둘러치는 울담은 꽤 높다. ❷ 통시는 재래 화장실과 돼지우리가 결합된 공간이다. 통시 바닥에 수시로 보리짚을 깔아 음식물과 배설물을 발효시켜 거름을 만들어내었다. 사람의 인분을 돼지가 먹었기에 제주도 돼지를 똥돼지라고 불렀다. ❸ 제주의 집은 ‘정주석’과 ‘정낭’을 설치해 대문을 대신했다. 세 개의 구멍 뚫린 ‘정주석’을 양 옆에 세우고, 긴 통나무 세 개를 걸쳤다. ‘정낭’이 한 개만 걸쳐져 있으면 잠깐 외출, 두 개 걸쳐져 있으면 좀 긴 시간 외출, 세 개가 다 걸쳐져 있으면 종일 출타 중이라는 표시다. ❹ 굴묵(방에 불을 지피던 아궁이)에는 붓돌(솟덕)을 양쪽으로 세워 솥을 얹고 불을 때었다, ❺ 부엌 바로 옆에 돌 받침대인 ‘물팡’을 마련해 두고 그곳에 주둥이가 좁은 물 긷는 항아리인 물허벅을 놓아두었다. 물허벅이 담겨있는 용기는 등에 짓기 편하도록 만든 물구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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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오름이나 그 주변에서 산담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명당터로 알려진 곳에는 산담들이 산재해있어 유택도시를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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❷ 마소의 출입을 막고자 두른 산담이 이채롭다. 남자의 무덤은 왼쪽에, 여자의 무덤은 오른쪽에 한 사람정도가 드나들 수 있도록 산담을 트고 길쭉한 돌로 막아둔 시문을 두었다. ❸ 산담 안에는 영혼을 달래주는 1m이하의 작은 석상인 ‘동자석’을 함께 두었다.

 

죽은 자를 보호하는 ‘산담’과 영혼의 벗인 ‘동자석’

제주의 무덤은 대부분 밭 한가운데나 오름에 많다. 무덤이 있고 그 주위로 사각형 또는 원형으로 돌담을 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산담’이라 부른다. 이는 밭과 경계를 지어 묘지를 구분하는 용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소가 출입하는 것을 막아 죽은 자를 보호하기 위한 의미가 크다. 보통 명당터로 알려진 곳에는 많은 무덤과 둘러쳐진 산담들이 즐비하여 망자의 도시와 같은 풍경을 만든다. 산담 안에는 영혼을 달래주는 1m이하의 작은 석상을 함께 세워두었는데 이를 ‘동자석’이라고 한다. 영혼에 대한 예를 갖추어 숭배, 봉양, 수호, 장식, 주술, 유희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형태는 하반신은 땅속에 묻혀있고 상반신이 노출되어 있으며 앞가슴에 촛대, 술병, 술잔, 꽃, 부채 등을 두 손으로 맞잡아 들고 있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섬세하기 보다는 투박한 미가 흐르며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어 제주인의 해학과 미를 알 수 있다. 동자석은 죽은 사람을 위한 정성의 징표로 이야기 동무이자 심부름을 하는 이를 두어 죽은 자가 외롭지 않게 배려한 제주인의 심성을 알게 해주는 돌 예술품이다. 이외에 상석, 비석, 망주석 등 현무암으로 만든 여러 가지 석물들도 산담 안에 놓아두기도 하였다. 제주의 장묘문화가 특히 이채로운 것은 신의 출입문인 시문을 두어 영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남자의 무덤은 왼쪽에 여자의 무덤은 오른쪽에 한 사람정도가 드나들 수 있도록 산담을 트고 길쭉한 돌로 막아두었다. 무덤이 제주의 생활 한가운데인 밭이나 목축을 하는 곳인 오름 자락에 자리하고 신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만드는 등 제주인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공존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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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차귀도가 보이는 용수리 방사탑이다. 돌탑 위에 돌하르방이나 동자석 같은 석상, 또는 새 모양의 자연석이나 석상을 세워 재앙을 막고자 하였다. ❷ 관덕정 앞에 세워진 구멍 숭숭 난 검은빛 현무암에 투박하게 조각해 만든 ‘돌하르방’이다. 제주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마을의 경계와 지킴이의 역할을 하였다. ❸ 대정골에 세워진 돌하르방이다. 대정골의 돌하르방은 제주목의 것에 비해 작고, 대체로 이등신으로 조각되어 있어 소박하면서도 해학적이다.

 

마을 지킴이 ‘돌하르방’과 액운을 막는 ‘방사탑’

제주의 상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돌하르방’이다. 구멍 숭숭 난 검은빛 현무암에 투박하게 조각해 만든 석상, 돌하르방은 가장 제주적이고 제주인의 모습을 닮은 상징물로 그 표정 없는 우직한 모습에서 제주인의 소망과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돌하르방은 제주의 3개 읍성인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세 읍성(邑城) 동·서·남문에 각각 세워져 있었다.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등으로 불렀고 문헌에는 ‘翁仲石(옹중석)’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옹중석은 진시황 때 엄청난 힘과 체구를 지닌 장수로 그러한 위엄을 지닌 돌하르방을 성문 입구에 세워 타지에서 오는 사람이 성에 입성하면서 절로 경건함이 들도록 의도하였다. 돌하르방 두개는 경복궁에 있고, 제주시에 21기, 대정읍에 12기, 성읍리에 12기 등 총 45기가 지방민속 자료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돌하르방이 마을 경계 역할과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면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는 것은 ‘방사탑’이었다. 방사탑은 마을 단위의 경계석이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기원탑으로서 돌탑 위에 돌하르방이나 동자석 같은 석상, 또는 새 모양의 자연석이나 석상을 세워 재앙을 막고자 하였다. 탑을 쌓아 올리기 전, 그 속에 밥주걱이나 솥을 묻은 후 그 위에 사람의 키 높이 이상으로 돌을 쌓는다. 밥주걱을 묻는 이유는 솥의 밥을 긁어 담듯이 외부의 재물을 마을 안으로 담아 들이라는 뜻이요, 솥을 묻는 것은 솥이 무서운 불에도 잘 이겨내니 마을의 재난을 막아 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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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❶ 신양리 해녀들의 쉼터인 ‘불턱’이다. 지붕도 없고 대문도 없지만 해녀들의 고단한 삶을 녹여주던 소중한 사랑방이다.

 

바다 밭의 자연그물 ‘원담’과 해녀들의 쉼터 ‘불턱’

바다 밭은 마을 사람들의 공동의 밭이다. 돌담을 쌓아 만든 원은 밀물 때 들어온 고기를 가두었다가 썰물 때 잡는 천연 그물이다. 원담은 안과 밖을 달리 쌓아 올리는데 바깥쪽은 경사지게 돌을 쌓아 물고기들이 쉽게 들어오도록 하고 안쪽은 수직으로 쌓아 잘 못 나가도록 하였다. 바닷가 마을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쌓았고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원담이 긴요하게 제몫을 할 때는 멜이 들 때이다. 멜(멸치)은 바다 해수면 가까이에서 서식하는 멸치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멜이 많이 나는 이른 봄에는 누군가 ‘멜 들었쪄’하고 외치면 너도나도 양동이나 그릇을 들고 원담으로 가 퍼내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가까운 바다에 돌담이 원담이고 육지로 올라온 곳에 1평 남짓한 작은 규모로 돌담으로 둘러쳐진 것은 해녀들의 사랑방인 ‘불턱’이다. 지붕도 없고 대문도 없지만 해녀들의 고단한 삶을 녹여주던 소중한 쉼터다. 바람을 막기 위해 돌담을 네모형이나 둥그렇게 쌓아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해녀들의 휴식시간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였다. 불턱 안에서 물질에 필요한 도구를 챙기고 물질하기 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안에서 경험이 많은 해녀들에게 바다에 대한 정보와 위험상황에 대처했을 때 어찌해야하는지를 듣는 해녀 교육이 이루어졌고. 밭에서 일하다 물때가 되면 부랴부랴 바다로 물질하러 나가야 했던 해녀들의 고단한 삶에 하나의 분출구처럼 가슴 속 이야기를 풀어헤쳤던 소통과 결속의 공간이었다. 한겨울에도 바다 속에 들어가 물질을 해야 했던 제주 여인들에게 온기를 주었던 불턱이 이제는 많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들의 애환은 여전히 바닷가에 남아있다.

 

 제주의돌10

❷ 돌담을 쌓아 만든 원은 밀물 때 들어온 고기를 가두었다가 썰물 때 잡는 천연 그물인 ‘원담’이다. ❸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여 목성(木城)으로 만들었다가 훗날 석성(石城)으로 쌓은 조선 시대 성곽인 ‘명월진성’으로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한다. ❹ 명월진성의 성벽 ❺ 외적이 침입하여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연대와 봉수대를 세웠다. 연대는 바닷가 구릉에 세워졌으며 사진은 애월연대의 모습이다. ❻ 바닷가를 따라 돌무더기로 쌓아 올린 성곽의 형태를 만날 수 있는데 과거 왜구의 침입을 막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환해장성’이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바닷가에 쌓은 ‘성’과 ‘연대’

제주도는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는 외진 섬으로 유난히 왜구의 침탈이 잦았다. 바닷가를 따라 가다 보면 간혹 돌무더기로 쌓아 올린 성곽의 형태를 만날 수 있는데 과거 왜구의 침입을 막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환해장성’이다. 애초에 환해장성은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해안가를 따라 300리(대략 120km)길에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에 숱하게 외적의 침입을 받아야 했던 제주도는 배가 닿을 수 있는 곳에 환해장성을 보수하고 더 축조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반적인 돌담과 달리 바다쪽은 담이 높고 육지 쪽은 담이 낮은 겹담의 형태이다. 두 담 사이에는 잡석을 채웠다. 성이라고 하지만 웅장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쳤던 제주 백성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는 환해장성은 그리 웅장하지도 단단해보이지도 않지만 왜구의 침탈을 막아보고자 하였던 간절함이 배어 있어 보는 이를 생각에 젖게 한다. 외적이 침입하여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연대와 봉수대를 세웠다. 원래 연대는 구릉에 세워졌고, 봉수대는 산정에 세웠으나 제주의 경우는 둘 다 바다가 보이는 주요지점에 25개소의 봉수대와 38개소의 연대가 세워졌다. 평상시에는 한 번 불을 피워 올리고 외국배가 보이면 두 번, 가까워지면 세 번, 제주도를 침입 하면 네 번,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 번을 올렸다고 한다. 연대는 현재도 해안선을 따라 가다 보면 사각형의 돌을 쌓아 만든 연대를 만날 수 있다.

 

돌은 제주사람들에게 생존, 주거, 죽음, 신앙, 바다밭, 방어 등 삶 그 자체일 뿐 아니라 죽음까지 돌보았던 귀한 존재다. 가끔 유희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는데 각 마을마다 어귀에 커다란 돌인 ‘듬돌’을 놓아두고 청년들끼리 힘겨루기를 하였다. 또한 ‘듬돌들기’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인정하는 관례로 삼았다. 돌구들 위에서 태어나 돌이 지천인 척박한 땅에서 생존을 위해 공존하며 살아야 했던 제주사람들에게 돌은 지금의 제주문화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척박한 자연을 이기는 지혜의 산물로 돌담, 올레, 원담, 불턱, 산담이 있고 염원을 가득 담은 상징물로 돌하르방, 동자석, 돌하르방, 방사탑이 있다. 연대와 환해장성, 진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을 막았으며 듬돌로 마을간 단합을 꾀하고 의례를 행하였다. 제주의 돌문화는 세계인이 보물로 여기는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과 함께 보존해야할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아이러브제주도장


에디터 / 황정희

포토그래퍼 / 오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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