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특집] 가장 제주다운 것 –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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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진정 여자가 많은 섬인가?

제주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지금의 자립적인 제주의 여인상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여정을 보내야했을까. 그들은 척박한 자연과 핍박의 역사를 극복하였고 지금의 제주의 어머니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해녀와 설화, 독특한 문화유산에 그들의 의미를 남기고 있다. 힘들고 고된 삶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지금에 이른 제주여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女多의 섬, 제주도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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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하고 슬기로운 女多의 섬

제주에는 ‘여자가 많다’라고 습관적으로 말하여지는데 실상은 자연환경이나 사회상황에 따라 많았던 시기도 있고 적었던 때도 있었다.

현재에는 남녀의 구성비는 비슷하여 여다의 섬이라 부르기에 멋쩍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부득불 여자가 많은 섬이라 하는 것은 오래전의 제주 역사에서부터 각인된 인식이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다는 설화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신들의 존재에서부터 시작된다. 제주의 주요 설화에 등장하는 설문대할망, 영등할망, 자청비, 가믄장아기 등 많은 여성신은 제주여성의 정체성과 제주사람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다. 독립적이고 창의적이며 현명하기까지 한 제주여인에 대한 존경심도 엿볼 수 있다. 설화속에서 제주여성의 진취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외돌개, 절부암 등 이야기가 전해지는 명소는 섬사람들의 숙명적 삶과 함께 제주여인의 절개를 그려내고 있다. 해녀는 상징적으로 제주의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의 등재를 추진 중인 제주 해녀의 삶과 역사는 애환이 서려있고 이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의지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녀반수라는 여성 최고의 지위를 얻었던 김만덕, 고립된 섬 제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그녀에게서 제주여인의 기개와 배짱을 읽는다. 여성의 손길과 발길이 닿아있는 생활문화유산들이 제주여인의 생활상과 제주여인의 고단한 삶을 보여준다. 꾸덕꾸덕 만져지는 거친 살갗, 바닷바람에 주름진 표정을 지닌 제주의 어머니,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삶을 지탱해온 내 어머니들이다. 그대가 있기에 제주의 칼바람도 매섭게 느껴지지 않고 돌투성이 척박한 땅도 두렵지 않다. 제주의 여자는 제주의 바람막이였으며 거친 땅을 일구는 강인한 손이었다. 불굴의 의지로 제주를 지켜온 제주의 어머니 – 당신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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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읍 와흘리에 있는 신당(神堂)에서 당제를 지내는 날이면 마을 남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아직도 원형이 살아있는 제주의 본향당신을 위한 제에 참여한다.

 

설화와 女

설화는 제주사람들의 피 속에 뼈 속에 자리 잡은 그들의 뿌리 깊은 생각이다.

제주의 중심에는 한라산이 솟아있고 360여개의 오름들은 그 자식들처럼 제주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설화에서 한라산과 오름을 만든 거대 여신으로 설문대할망이 등장한다. 한라산은 지형상 제주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제주인의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한 축과도 같다. 한라산을 만들 당시 흙을 퍼 나르던 보자기의 터진 틈사이로 떨어진 흙이 수 백 여개의 오름으로 만들어졌다. 오름은 제주에게 마음의 고향이다. 마음의 중심이자 고향인 한라산과 오름이 여성신에 의해 창조되었음이다. 제주 여성신의 활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청비는 남자로 변장하는 담력과 지혜를 지닌 여신이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지닌 신으로 하늘의 주인인 옥황상제로부터 하늘에서 살기를 권유받지만 오곡의 씨앗을 가지고 제주섬으로 내려와 농경·목축을 관장한다. 가믄장아기 설화 또한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과 운명을 만들어가는 여신 이야기다. 설화에 등장하는 여신의 성격이 바로 환경이나 남자에 구애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제주 여인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이외에도 여신은 바람을 관장하는 ‘영등할망’, 아이를 점지하고 돌보는 ‘삼승할망’, 힘센 여장부 ‘강씨할망’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무속신앙은 어떠한 체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신앙이다. 그 안에 제주도민의 인생관,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크다. 남성들이 유교적 관례에 의해 미신이라고 경시했던 것과 달리 제주 여자들은 마을의 수호신을 ‘본향당신’이라 믿고 이에 대한 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개 있고 자립심 강한 여신들이 제주를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여신 이야기는 심방들이 굿을 할 때 본풀이로 노래처럼 불린다. 제주 여인들은 강력한 힘을 지닌 여신을 받들며 자신을 신에 오버랩시켜서 어떠한 고난에서도 굳세게 일어나서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강한 의지와 지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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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2월이 되면 영등신을 위하는 ‘영등제’를 드리는데, 영등제는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해안마을의 어부나 해녀들이 정성을 다 해 드리는 제사이기도 하다. ❷ 바다 한 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외돌개는 ‘할망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심금을 울린다. 최영장군이 외돌개를 장군의 형상으로 치장시켜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전설과 女

섬에는 바다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한다.

용수리 포구 곁 울창한 고목 속에 ‘절부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조실부모한 강씨 총각과 고씨 처녀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채 일주일도 못 되어 배를 타고 나간 남편이 풍랑을 만났다. 거의 미친 사람처럼 바닷가를 돌며 시체라도 떠오르기를 하늘에 빌었으나 석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포구 곁 절벽 위에 목을 매어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고 그 날 저녁 바로 그 절벽 밑에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이에 동네사람들이 그 둘의 시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한다. 고씨가 목매어 죽은 절벽을 절부암이라 부르게 되었고, 매년 3월 15일에는 그의 묘에서 열녀제를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제주 남자들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였고 배는 풍랑에 버틸 만큼 안전하지 못하였다. 고기잡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남편, 아들을 기다리는 아낙이 어찌 그녀뿐일까. 배를 타고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전설은 외돌개에도 전한다. 바다 한 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외돌개는 ‘할망바위’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심금을 울린다. 할망, 하르방이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던 어느 날 바다에 나간 할아버지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였다. 할머니는 바다를 향해 하르방을 목놓아 부르며 통곡하다가 바위가 되었고 그 바위가 바로 ‘할망바위’다. 그 옆에 있는 누운 형상의 바위는 바다에 빠져 죽어 물을 잔뜩 먹어 배가 부른 ‘하르방바위’다.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그리다 죽어 바위가 된 이야기는 여인의 절개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바다 한가운데 오도카니 떠있는 섬 제주의 환경은 바다를 통해 삶의 지탱해야만 하는 제주인의 삶을 절박하게 얘기하고 있다. 전설의 섬, 이어도는 해녀들만 사는 섬이며 남자들은 죽어서야 들어갈 수 있는 환상의 섬이다. 죽어야만 갈 수 있지만 걱정거리가 없는 곳으로 현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었는지 이를 잊기 위해 이상향인 이어도를 그리며 모진 삶을 이어갔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해녀노래의 후렴구에서 이별이 없는 영원한 이상향인 이어도에 가서 살고픈 마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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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속 천길 물속으로 물질하러 들어가 자력으로 숨을 참아내며 바닷물고기나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여인의 대표적인 상징 해녀이다.

 

해녀와 女

섬에는 바다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한다.

제주 바닷가에 서면 어디선가 ‘호이~’하는 특이한 휘파람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숨을 멈추었다가 한꺼번에 터질듯이 내는 숨비소리다. 저승길을 오락가락 하다 간신히 찾아낸 생명줄에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이내 다시 천길 물속으로 물질하러 들어가는 해녀들이다. 그들의 고통과 애환이 한꺼번에 토해져 나오는 듯이 높고 길게 울려 퍼지는 숨비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온다. 제주 바닷가 곳곳에 해녀의 한과 삶이 묻어나지 않는 바닷가가 없다. 해녀는 전복, 구젱기 등의 패류와 미역, 우뭇가사리 같은 해조류를 채취해 곤궁한 살림을 메우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였다. “똘 나민 도새기잡앙 잔치   곡, 아덜 나민 발질로 조로팍 차분다”(딸을 나면 돼지잡아 잔치하고, 아들을 나면 발길로 궁둥이 차 버린다)” “똘 쉿이믄 부재난다”(딸 셋이면 부자 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한 때 해녀인 딸이 셋 있는 경우는 해마다 밭 한 뙈기씩 사서 부자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딸들은 7~8세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하여 15 ~16세가 되면 바다 속으로 물질하러 들어간다. 17~18세가 되면 비로소 해녀(   녀)가 되고 제몫을 다한다. 해녀로서의 삶은 60을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등 한평생 바다와 육지를 넘나들며 살아간다. 물때에 맞춰 물질을 나가는 시간 외에는 쉬지 않는다. 물때가 아니거나 풍랑으로 물질하러 나갈 수 없을 때에는 밭에서 김을 매는 등 밭일을 하였다. 잠시라도 틈이 나면 생명수인 물을 길어오기 위해 돌투성이 자갈로 된 비탈길을 5~10리까지 수시로 오고갔다. 제주여성이라는 숙명은 쉴 틈이 없이 노동에 얽매이게 했다. 노동의 중심에 제주여자가 있었으며 필연적으로 강인한 생활력으로 단련되었다. 강인하고 부지런한 제주여성을 대표하는 것이 해녀이다. 제주의 해녀들은 엄동설한에도 15~20일 가까이 작업을 한다. 일본의 해녀들이 겨울에 5일여나 작업을 하는 것에 비하면 비교 불가한 내한력이다. 20m의 바닷속까지 들어가 2분 남짓 견딜 수 있고, 애를 낳기 직전 직후에도 작업을 하는 등 비상한 기량과 초인적인 정신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강인함으로 물질을 하여온 제주해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을 추진 중이다. 해녀는 여성의 직업이기 이전에 제주의 문화이자 정체성이다. 도민과 국민이 함께 해녀를 세계의 귀중한 무형유산으로 등재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여 성과를 얻어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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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해녀들이 물질을 하다 수면 위에 떠있는 테왁에 몸을 의지하여 숨을 고르며 바다 위에서 짧은 휴식을 취했다. ➋ 그녀들에게 테왁은 작지만 너무도 소중한 휴식처였다.

 

의녀와 女

의로움이 하늘 끝까지 닿은 제주여인 김만덕.

김만덕(1739~1812년) 조선시대 의녀반수라는 여성최고의 지위를 받은 조선 정조시대의 걸출한 여걸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2살에 부모를 모두 여의어 기생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그런 기생출신의 제주여인이 서울 장안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사대부들이 직접 만나보고 싶어 줄을 서는 여성이 되었다. 이는 만덕이 객주를 운영하여 쌓은 막대한 부를 계속되는 기근에 굶주리는 제주도민을 살리기 위해 선뜻 내어 놓는 용기와 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보낸 구휼미는 풍랑에 바닷속으로 수장되고 당장 먹을거리가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본 만덕은 전 재산을 털어 쌀을 사서 백성을 살렸다. 특히 정조가 그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해 소원을 물었을 때 만덕은 주저 없이 금강산 구경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당시는 “관의 허락 없이 제주도민은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출륙금지령이 있던 시기다. 제주섬을 벗어나 금강산 구경하기를 소원으로 청하다니 큰 배포와 남다른 의식을 지닌 여인임에 틀림없다. 발은 제주에 묶여 있다 하더라도 세상을 보는 넓은 안목을 지닌 데다 임금도 하기 어려운 일을 서슴없이 해낼 정도로 강단이 있었던 여인 김만덕은 지금까지도 의녀로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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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허벅은 제주도의 생활환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옹기그릇으로 배는 불록하며 바닥은 평평하다. 물이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주둥이를 좁게 만들었다.

 

문화와 女

제주는 과연 한국의 아마존이었나? 제주도에는 ‘수눌음’이라는 서로 주고받는 문화가 있었다

이는 남자가 귀했던 제주에서 여자들이 힘든 밭일을 해나가기 위해 일종의 ‘계’처럼 주민들끼리 돌아가면서 남의 밭일을 도와주는 것이다. 들녘에 나가면 내 밭 남의 밭 가리지 않고 김매기하는 여인네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고 바닷가에 서면 ‘호이’하는 숨비소리와 함께 일년 사시사철 물질을 하는 해녀들을 볼 수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는 물허벅을 등에 지고 물을 실어 나르는 소녀부터 나이 든 여자까지 시시때때로 눈에 들어왔다. 집 안팎, 마을 안팎을 쉼 없이 드나들며 생활했던 활발한 여인들의 모습이 제주도를 한반도의 아마존처럼 여기게 했다. 섬이라는 특성상 남자들은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야 했고 고기는 대부분 밤 시간에 잡기 때문에 밤에 일하러 나갔다 돌아온 남자들은 낮에는 집에서 잠을 자거나 아이들을 돌보며 보냈다. 눈에 뜨이는 남자가 없으니 여자만 많은 섬이 된 것이다. 물론 실제로 남자의 수가 적기도 하였다. 태풍의 길목에 위치하였고 바다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바다에 남편과 아들을 뺏기고 눈물짓는 여자들이 많았다. 남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사회 환경도 한 몫 하였다. 척박한 자연환경도 견디기 힘든데 관리들은 끝없는 수탈을 자행했고 왜구의 침입도 잦았다. 전복이니 말이니 지나친 공물요구까지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삶을 피해 남자들은 제주땅을 벗어나고자 하였고 다른 지역으로 달아나는 남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결국 출륙금지령이라는 극단의 조치가(1692~1834년) 취해진 적도 있다. 남자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여자들 몫이었으며 노동과 집안을 꾸리느라 온힘을 다해야만 했다. 사회에서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역할을 담당해나갔다. 20세기 중반이후에는 ‘야무지고, 강인하고, 생활력이 강하고, 진취적’이라는 제주여성의 특징이 정형화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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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애기구덕은 대나무로 만든 이동식 아기침대이다. 애기를 뉘어 손 또는 발로 흔들면서 동시에 집안일을 하거나 밭일을 하였던 제주여인의 필수 생활용품이었다. ➋ 물이 귀했던 제주에서는 제주여인들은 물허벅을 등에 지고 물을 길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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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를 잠재우는 요람 ‘애기구덕’을 통해 제주여인의 바쁜 생활을 알 수 있다.

아기를 재우는 침대는 동서양 어디에도 있지만 손 또는 발로 흔들면서 동시에 집안일을 하거나 밭일을 하는 용도로 쓰이지는 않았다. 애기구덕은 시간을 쪼개서 일인 다역을 해야 했던 여인에게 긴요한 생활용품이었다. 뭍에서의 생명그릇은 물허벅이었다. 지금은 펑펑 지하수를 뽑아 올려 사방팔방으로 물을 팔고 있는 제주도지만 화산섬은 물이 제일 귀하다. 비가 오는 족족 스펀지처럼 땅속으로 스며버린 물은 바닷가 근처의 용천수에서나 겨우 솟아오른다. 물을 긷기 위해 돌투성이 자갈투성이 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야 했던 제주여인들에게 물허벅은 가장 애지중지하여 옆에 둔 생활 필수용구였고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어머니로 그 됨됨이를 평가받는 1차 수단이었다. 해녀들의 생명장치는 테왁이다. 물질을 하다 수면 위에 떠있는 테왁에 몸을 의지하여 숨을 골라 바다 위에서 짧은 휴식을 취했다. 밭일에 물질에, 물 긷느라 촌각을 다툴 정도로 바쁜 나날들은 음식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조리시간이 짧은 음식을 주로 해먹었고 낭푼밥상이라는 독특한 식문화를 만들었다. 밥과 반찬을 ‘낭푼’이라는 큰 그릇에 담아 공동으로 먹는 식으로 어머니들이 물질하러 나가면 집에 남은 식구는 국만 떠서 식사를 해결하였고, 동네 꼬마들도 어느 집이고 들어가서 함께 식사를 하였다. 바쁘고 힘겨운 삶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지혜를 낳았고 그 중심에는 제주의 여인들이 있어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만들어나갔다.

 

제주의 여자를 설화와 전설 속에서, 해녀의 삶으로, 의녀 김만덕과 문화를 통해, 생활용품에 담겨있는 지혜와 함께 만나보았다. 각각의 테마였지만 제주여인이 강인하고 진취적으로 삶을 이끌어갔다는 하나의 귀결점에 이른다. 돌, 바람이 제주를 척박하게 만들지라도 굴하지 않았다. 모질디 모진 자연조건을 정신력으로 이겨내고 지혜를 발휘하여 극복해나갔다. 돌투성이,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대는 섬에서 어머니이자 아내, 딸로서 한 시도 쉴 틈이 없이 일하였던 제주여인들, 불굴의 의지를 지닌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이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가 남긴 말이다. 제주는 여자가 많은 것이 아니라 강인하고 슬기로운 어머니들이 많은 섬이다.

 

 

아이러브제주도장


에디터 / 황정희

포토그래퍼 / 오진권, 서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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