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나는 걷는다, 이 길을 고독과 함께 – 올레19코스

올레19코스

나는 걷는다, 이 길을 고독과 함께

 

황량한 길 위에 섰다. 뺨을 할퀴는 바람만이 반겨주는 길. 걸음걸음마다 눈물이 차오른다.

그러나 이 삭막함 속 한줄기의 낭만을 느끼는 것은 겨울 올레를 혼자 걷는 사람만의 특권이 아닐까.

 

“외로움이 ‘홀로 있는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라면, 고독은 ‘홀로 있는 영광’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이다.”

– 폴 틸리히 Paul Til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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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는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이토록 명쾌하게 정의했다. 외로움이 홀로라는 것을 괴로워하는 감정이라면 고독은 혼자임을 즐기는 상태이다. 차가운 공기와 매서운 바람이 뼛속부터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이 겨울, 고독을 제대로 한번 즐기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올레 19코스를 걸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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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겨울이 지나면 볼 수 없을 억새. 흐린 하늘 아래, 바람에 흔들리며 쓸쓸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❷ 멀리 다려도가 보이는 북촌포구길을 따라 걸으며 사색에 잠겨본다. ❸ 몇 시간이고 홀로 걷다 보면 내 안의 묵은 것들도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올레가 가진 치유의 힘이 아닐런지. 

 

마음이 서늘한 당신, 걸어라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있어도 외롭다고 느낄 때가 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군중속의 고독’을 느낀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이자 존재를 증명하는 고독.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서 혼자라는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면 주저 없이 길을 떠나라고 권하고 싶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비밀스런 여행이기 때문이다.

총 거리 18.8km, 조천 만세동산에서 시작해 신흥, 함덕, 북촌, 동복을 지나 김녕 서포구에서 끝나는 올레 19코스는 2011년 9월 24일에 개장되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새내기 올레라 홀로 걷기 더 없이 좋으며 서우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지로 이어져 큰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19코스는 바다와 오름과 숲, 곶자왈 외에도 마을길과 밭길을 모두 지나 제주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고, 마주치는 올레꾼도 거의 없어 6~8시간 동안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는’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올레길이다.

 

길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나그네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었다. 걷는 내내 동무가 되어준 것은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뿐. 혼자여서, 쓸쓸해서, 또 외롭고 또 고독했기에 걸을 수 있었던 19코스. ‘고독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깊이 보게 되는 기회’라고 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말처럼, 그 어느 때보다 가슴 뜨겁게 나와 마주했던 올레였기에 이 겨울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대, 행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이 길에서 고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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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서우봉해변에서 그리운 이의 이름을 써 본다.

 

 

그곳에는 바람이 있었다

만세동산 뒤, 조천 밭길에서부터 모자를 단단히 고쳐 써야 한다. 제주의 바람은 겨울이면 광기어린 왕처럼 모든 것을 갈퀴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구름 뒤로 해가 숨어버린 하늘 아래, 절정에 이른 바람을 고스란히 맞노라면 걸음을 뗄 때 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시간이 넘는 이 길을 걷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미당 서정주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늘 나를 걷게 하는 것도 어쩌면 제주의 바람일지 모른다. 아니면 이 길을 걷게 만든 내안의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일 런지도.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기면 돌담으로 이어진 적막한 밭길을 지나 신흥해수욕장으로 들어선다. 또 바람이다. 밭길보다 더 매서워진 신흥바다의 바람이 사정없이 두 뺨을 할퀸다. 신흥포구와 마을을 거치고 해녀와 조우한 후 함덕서우봉해변으로 들어서면 어느 정도 바람을 즐길 수 있게 되니 이제야 제대로된 올레꾼이 된 것 같다. 파도에 쓸려가는 하얀 포말처럼 내 안의 묵은 감정들도 세찬 바람과 함께 바다로 날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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❹ 서우봉에서 내려보는 바다는 마치 성난 사자처럼 느껴진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하얀 포말을 만들며 부서지는 파도가 장관이다. ❺ 올레코스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간세다리. 언제 만나도 정겹다. ❻ 19코스를 걷다가 만나는 보석같은 맛집, 함덕 `좀녀 해녀촌’의 성게보말죽. 이곳은 함덕 어촌계에서 운영하며 해녀들이 직접 물질해 온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메뉴를 5,000원부터 즐길 수 있다. 위치 – 함덕포구 앞 (064-782-6769) ❼ 난시빌레에서 벌러진 동산까지는 고독의 최고조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하늘, 바다, 숲, 밭… 그 속에서 나를 만나다

해변에서 마음속 낡은 것들을 비워서일까. 서우봉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이는 비움의 뒤에 채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해안을 내려보며 오르는 서우봉에 서면 시원한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고 내안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 벅차오른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 지나간 한 해를 잘 견뎌주어 고맙다는 위로,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 내가 누구인지는 철저하게 자신과 대면하는 고독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던가. 그렇게 올레 19코스 안에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서우봉을 내려가면서부터는 북촌으로 가는 길이다. 북촌포구에서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다려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마을과 밭길을 지나고 큰 도로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숲과 곶자왈이 어우러진 난시빌레를 만난다. 난시빌레에서 벌러진 동산까지 약 3km, 1시간가량 이어지는 이 길은 올레 19코스 중 가장 고독하고 쓸쓸한 길이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나를 반겨주는 것은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와 빨갛고 파란 올레 이정표 뿐. 지나가는 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철저하게 나 혼자 걸어야만 하는, 정말이지 눈물이 뚝뚝 흐를 만큼 외로운 길이다.  해도 바람도 숨어버린 이 숲길에서  모진 고독과 마주하며 걷고 또 걸어간다.

숲길에서 나오면 본격적인 밭길(김녕농로)이다. 숲에서 외로움과 고독의 절정을 맛보았다면 밭길에서부터는 온기를 느끼며 걸을 수 있다. 간간히 밭에서 보이는 주민들과 인사도 나누고, 지독한 겨울바람 속에도 꿋꿋한 생명력으로 싹을 틔우는 작물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기 때문이다. 저 멀리 풍력발전단지의 풍차와 김녕바다도 보이기 시작한다. 종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약 한 시간동안 밭길을 걸은 후 남흘동 마을로 들어선다. 백련사를 지나면 푸르기로 소문난 김녕바다가 코앞에 펼쳐진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 간세다리 앞에서 그리웠던 사람에게 문자를 보낸 후 종점을 향해 출발하며 19코스의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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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브제주도장


에디터 / 이유민

포토그래퍼 / 오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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