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전설의 맥 / 전통의 숨결

삼성혈
 전설의 맥

만 8천 신들의 섬, 제주를 탄생시킨 신들을 만나다.

 

신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버금가고 세계적인, 그리고 다채로운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곳. 제주땅에서 만나는 수많은 신들의 이야기는 무한한 상상력과 독특한 해학, 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이 넘치는 제주인들의 삶의 흔적이다. 
삼성혈전설

제주 건국신화의 삼신인은 삼성혈에서 활을 쏘아 자신들이 나눠 살게 될 곳을 정했다. 화살이 떨어진 곳은 현재의 제주시의 일도·이도·삼도동이 되었다. 

 

 

제주인은 신들을 사랑하였다.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있어 1만 8천 신들의 섬이라고 불리는 제주는 땅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것을 가르는 개벽신화를 지니고 있다. 이는 제주 신화의 범 우주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천지를 나누는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를 만든 창조신화 그리고 제주의 조상이 된 이들이 나라를 세운 건국신화 등 굵직굵직한 신화와 함께 크고 작은 신들이 웃고 울면서 제주인과 동거동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제주에 유난히 신들이 많은 것은 제주인들의 힘겨운 삶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먹을 것은 물론 물조차 풍족하지 못하였던 제주인들은 고된 심신을 달래고 의지하기 위해 신들을 많이 불러 세웠으리라. 제주의 신화는 제주인의 영혼을 달래주는 위안처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신화지만 역사성이 있는 삼성신화는 제주의 시조인 고양부 삼성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의 건국신화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며 제주인의 나눔의 정신과 평화사랑의 정신을 만나보자.

탐라개국의 삼신인이 솟아 난 성스러운 세 개의 혈(穴)이 위치한 삼성혈은 사색과 고요가 흐르는 특별한 공간이다. 우거진 송림 숲 한 가운데 봄날 파릇파릇 올라온 싱그러운 초록잔디에 세개의 구멍이 품자(品字)형을 이루며 뚫려있는데 수령 500년 이상의 노송과 수십 종의 고목이 혈을 향하여 경배하듯이 나뭇가지를 뻗고 있어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 개의 지혈에는 아무리 눈이 많이 내리거나 비가 많이 와도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하니 더욱 신비스럽다.

삼성혈에서 솟아 나온 세 신인은 고(高)·양(良 : 뒤의 梁)·부(夫) 삼성 씨족의 시조로서 제주땅의 조상이 되었다. 수렵생활을 하며 나날을 보내던 그들이 바닷가에 떠내려온 궤짝을 발견하여 열어보니 세 개의 옥함이 들어있었다. 한 옥함에서는 오곡의 종자가, 또 한 옥함에서는 육축(六畜)이 세 번째 옥함에서는 벽랑국 황제의 딸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세 처녀가 걸어 나와 그들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예식을 치렀던 혼인지와 나무 상자가 발견된 해안 연혼포(속칭 황루알), 또한 삼신인이 신방을 꾸몄던 굴을 신방굴이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은 각기 생활 할 터전을 마련하기위해 한라산 중턱에 올라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 쏘는 시합을 하여 살 영역을 정하였다. 지금의 제주시 화북동 조금 넘어간 곳에 활을 쏘아 맞췄던 돌로 전해지는 삼사석이 남아 있다. 이로부터 수렵에서 벗어나 오곡의 씨를 뿌리고, 우마를 기르는 농경문화가 발달하게 되어 번성하는 탐라국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한다.

삼성혈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으나 다른 공간에 뚝 떨어진 것처럼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삼성신화는 제주 도민에게 사실로 믿어져 왔으며, 조선 중종 때 삼성혈에 울타리를 두르고 비석과 홍문을 세워 세 신인의 후예로 하여금 제사 지내도록 한 이래, 오늘날까지 유교식 제법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상에 대한 숭배의식과 혼이 살아있는 삼성혈을 거닐다보면 아무런 분쟁 없이 나누어 시작된 세시조의 정신이 살아있는 평화의 섬, 제주 사람들의 평화 사랑과 자립정신을 만날 수 있다.


문의전화 : 064-722-3315   Tip : 전시관에는 관련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영상실에서는 삼성혈의 신화 애니메이션을 4개국어로 무료로 상영하고 있다.

 

 

숨결

 

전통의 숨결

건축물에 새겨진 제주의 역사, 그 숨결을 더듬다.

 

멀고 먼 바다 길을 헤치고 다다른 제주 땅에서 제주역사를 만나다. 제주조상들의 투박하나 올곧은 지혜가 만져지는 제주의 전통 건축물! 제주인의 삶과 함께 하며 살아 움직이고 있는 역사의 숨결을 손끝으로 더듬기 위해 관덕정과 목관아지를 찾는다. 

 

제주에는 역사적인 의미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連이 아닌 孤의 특성인 섬의 지리적 환경과 화산석이 대부분인 건축자재는 웅장한 건축물을 남기기에는 한계성이 있었다. 또한 잦은 왜구의 침탈과 항몽의 격전지였던 역사상황은 그나마 남아있던 유적지도 많이 훼손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제주만의 역사성을 보여 주는 전통 건축물이 생생히 살아있으니 그 현장을 찾아 제주 선인의 지혜를 오감으로 느껴보도록 하자.

제주 선인의 옛 숨결이 가까이 느껴지는 도심 속의 문화 쉼터 ‘관덕정’은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크고, 밝고, 아름답고, 격식을 얻어 진실로 온 고을의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는 정자로 제주 돌인 현무암을 잘 다듬어 축대를 조성하고 그 위에 기단을 놓아 만들어져 위용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대들보 아래의 일곱 점의 뛰어난 벽화와 유려한 처마곡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돌하르방 4기가 묵묵히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제를 지냈던 칠성단과 정치, 문화의 중심이었던 목관아지를 이웃에 두고 오랜 세월 제주인의 삶과 역사를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인 관덕정이 본래는 세종 30년(1448)가을 신숙청에 의해 무예수련장으로 창건되어 연무장으로 이용되었다. 제주인들에게 이곳은 특정 계층의 심신 수련장이기보다는 생활문화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정사를 논하거나 잔치마당이 되기도 하였고  죄인을 다스리는 형장으로도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일제하에서는 항거의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자유 광장이 되기도 하는 등 제주인의 삶과 정신의 구심점이 된 곳이었다. 물론 이러한 역할은 바로 곁에 위치한 목관아지의 상징성에 따라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탐라국때 부터 관아터의 역할을 하였던 목관아지는 제주역사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공간이었던 제주목의 관아터가 집중 분포하였던 곳이다. 1435년(세종 17년) 고득종이 쓴 《홍화각기(弘化閣記)》에 따르면 제주목의 관아 시설들은 총 58동 206칸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거의 파괴된 것을 일부나마 복원하였다. 이는 제주의 방어시설과 행정, 생활상을 기록한 화첩인 “탐라순력도”에 의해 관아터를 조사·발굴하여 30여 채의 건물 흔적을 찾아내었고, 그중 8채가 복원되어 옛 관아의 위용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궁궐을 향해 배례를 하던 영주관을 중심으로 영청인 홍화각, 동헌(목사집무실), 연희각, 동헌의 외대문인 종루, 우연당, 귤림당 등이 들어서 있는 등 전국에서 원형을 가장 잘 재현한 관아터라고 한다. 복원에 쓰인 5만 여장의 기와는 제주인의 정신을 찾고자 하는 시민들이 헌납한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고대 탐라국시대 때부터 행했던 민속놀이를 재현하는 ‘탐라입춘굿놀이’에 사용했던 낭쉐(탐라왕이 끌던 나무로 만든 신성한 소로 풍요를 기원함)가 전시되어 있어 이채롭다. 이외에도 제주최초의 학교인 조선시대에 세워진 제주향교와 추사유배지 등도 제주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조용한 사색과 함께 제주 조상의 숨결을 느껴보는 시간들이 여행에 의미를 더해줄 것이다.


문의전화 : 064)728-8665  Tip : 관덕정과 목관아지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하므로 해설을 요청하면 제주문화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아이러브제주도장


에디터 / 황정희

포토그래퍼 / 오진권


제주여행매거진 <아이러브제주>에 실린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 받습니다. 사전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